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비에트-폴란드 전쟁 (문단 편집) === 배경 ===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진행되던 1917년 [[독일 제국]] 정부는 전쟁 수행에 따른 인적, 물적 자원의 동원을 위해 [[폴란드인]]의 협력이 절실해졌다. 따라서 독일은 [[러시아 제국]]령이었던 [[프리비슬린스키]]를 포함한 지역에 [[폴란드 섭정왕국|폴란드 왕국]]을 부활시켰다. 이로써 폴란드인들은 명목상으로나마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[[폴란드 제2공화국]]의 전신이 된다. 한편 과거 폴란드 영토였던[* 그냥 연방 영토가 아니라 '폴란드 왕관령', 그러니까 폴란드 국왕의 직할영토였다.] 우크라이나 지역은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가 멸망한 이후 러시아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있었으나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가 발흥함에 따라서 우크라이나 고유의 민족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.[* 정확히 말하면 원래는 [[카자크|코자키]] 장교단이나 성직자, 지식인 위주로 우크라이나 민족정체성이 이미 어느정도 뿌리내린 상태였고, 19세기 말부터는 우크라이나 일대의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이 정체성이 기층 민중(노동자, 농민)에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.] 이들은 [[2월 혁명]] 이후 라다를 소집해 모스크바와 동등한 권한을 가진 연방국가로서의 개편을 요구하였다. 이 조건에 케렌스키 정부는 사실상의 승인, 페트로그라드는 명시적인 동의를 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제헌의회를 폐지시킨 [[10월 혁명]] 이후 [[키이우|키예프]] 라다는 모스크바에 더 이상에 기대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립국가 건설로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하였다. 이에 볼셰비키는 [[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]][* 1919년 1월 6일 러시아 SFSR이 설치한 괴뢰국 [[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]]과 혼동하지 말 것.]이라는 우크라이나인 볼셰비키로 이루어진 괴뢰 체제를 앞세워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.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역을 휩쓸었으나, 5백여명의 사관학교 출신 결사대가 크루티에서 기차를 타고 진군하는 볼셰비키를 저지하는 사이에[* 당시 동원 가능한 부대는 키예프에서 볼셰비키의 봉기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. 결사대원들은 지금도 우크라이나 민족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.] 키예프 라다는 [[빈니차]]로 이전할 수 있었고 결국 우크라이나 정부를 붕괴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리가가 함락당하자 전쟁 수행능력을 잃어버린 볼셰비키는 [[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]]에서 [[벨라루스]]와 [[우크라이나]]의 독립을 인정해야만 했다. 벨라루스는 [[벨라루스 인민 공화국]], 우크라이나는 [[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]]을 건국했고,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가 아니었다.[* 10월 혁명 당시 볼셰비키가 자력으로 장악한 도시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가 전부고 나머지는 현지 행정부나 소비에트한테서 정변을 승인받은 게 고작이었다.] 따라서 폴란드가 러시아를 침략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지만 해당 지역에 주둔하던 볼셰비키를 선제 공격한 것은 사실이다. [[제1차 세계 대전]]이 끝난 후 명목상 동유럽에는 평화가 도래하였으나 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 두 당사자 중 하나인 독일 제국이 소멸하고 볼셰비키는 아직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해당 구역은 실질적으로 무주지가 되어버렸다.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, 러시아, 우크라이나의 생각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었는데 폴란드는 연방을 멋대로 분할해버린 당사자[* [[독일 제국]],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, [[러시아 제국]].]들이 모두 소멸한데다가 독일과 러시아가 국력을 회복할 상황을 대비해서 최대한의 완충장치를 확보하려 한 반면,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우크라이나 민족[* 혈연적 공동체가 아닌 말 그대로 우크라이나에 사는 모든 민족을 의미한다.]을 아우르는 독립국가를 건설하려 했고, 볼셰비키는 러시아 제국의 유산을 최대한 승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독일과 헝가리 지역에서 발생하는 소비에트 혁명을 최대한 지원하려 했다. 과연 [[러시아 SFSR]]을 위시한 볼셰비키는 [[독일 제국]]이 [[독일 11월 혁명|11월 혁명]]으로 붕괴한 이틀 후인 13일 [[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]]의 파기를 선언했고[* 볼셰비키가 막장스럽기 그지없는 브레스트-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한 이유 자체가 '''곧 독일 제국이 붕괴될 테니 그때 가서 무효화 때리면 그만'''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.], 그 직후 동유럽에 [[소비에트의 서방 공세]]라고 알려진 침공을 개시한다. 그 대상은 '''동유럽의 모든 신생국가''', 즉 [[에스토니아]], [[라트비아]], [[리투아니아]], [[벨라루스]][* 당시 국명은 [[벨라루스 인민 공화국]].], [[우크라이나]][* 당시 국명은 [[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]].]. 에스토니아는 1918년 11월,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12월,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에 침공을 당했다. 이 중 폴란드의 중심부와 지척인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수도 [[민스크]]가 함락되고 [[러시아 SFSR]]의 괴뢰정권인 [[벨로루시 SSR]]이 설치되어 볼셰비키의 침략을 당한 나라들 중 가장 빨리 망해버렸다.[* 벨로루시 SSR은 얼마 후 또다른 괴뢰정권인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Lithuanian_Soviet_Socialist_Republic_(1918%E2%80%9319)|리투아니아 SSR]]과 합병하여 [[리투아니아-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|리투아니아-벨로루시 SSR]]을 성립하지만 폴란드에게 패배하고 볼셰비키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다시 벨로루시 SSR로 환원되었다.][*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각각 동년 1월 3일과 5일에 수도 [[리가]]와 [[빌뉴스]]가 함락당하고 소비에트 괴뢰정권들이 설치되며 국토 거의 대부분이 점령당하는 등 멸망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남았다.] 한편 우크라이나도 1919년 1월 7일 소비에트 러시아의 재침을 받았다. 이 침공으로 인해 1919년 1월 1일만 해도 해안지대를 제외한 [[드니프로 강]] 서안 전역과 동안의 일부를 통치하던[* 원래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중앙부만 통치하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었으나 이 즈음에 동부 갈리치아에서 민족자결을 선포한 동포국가 [[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]]과 통일하여 [[드니프로 강]] 서안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. 그런데 서우크라이나가 대(對)폴란드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얼마 안 가 동부 갈리치아를 상실하고 만다.]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2월 5일에 수도 [[키이우|키예프]]를 내주고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-서남부 일대만 간신히 점유하는 빈사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.[* 3월에 반격작전을 펼쳐 8월 말 키예프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동시기에 모스크바로 진공하던 [[안톤 데니킨]]의 남러시아 백군에게 키예프를 내주고 만다. 거기에 군인 대부분이 티푸스에 감염되면서 군대가 거의 붕괴되고 말았다. 폴란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1920년 3월에 이르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[[카미야네치포딜스키]] 인근만 간신히 통제할 정도로 세력권이 쪼그라들게 된다.] 볼셰비키가 동유럽 신생국들의 독립을 인정할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자, 폴란드는 볼셰비키와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